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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 철저히 감춰졌던 그날의 9시간

by hanulzzinggu 2025.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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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월 12일 그날 밤 서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감독: 김성수

출연:  황정민, 정우성, 이성민, 박해준, 김성균

장르: 시대극, 밀리터리, 정치

개봉일: 2023년 11월 22일

러닝타임: 141분

관람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넷플릭스공개일: 2024년 5월 10일

 

1979년 12월 12일, 수도 서울 군사반란 발생

그날, 대한민국의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대한민국을 뒤흔든 10월 26일 이후, 서울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온 것도 잠시

12월 12일, 보안사령관 전두광이 반란을 일으키고 군 내 사조직을 총동원하여

최전선의 전방부대까지 빼내 수도 서울로 불러들입니다.

권력에 눈이 먼 전두광 보안사령관의 반란군과 이에 맞선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을 비롯한 정부군 사이,

일촉즉발의 9시간이 흘러가는데...

목숨을 건 두 세력의 팽팽한 대립과 갈등

오늘 밤, 대한민국 수도에서 가장 치열한 전쟁이 펼쳐집니다.

대한민국의 운명이 바뀐 그날, 그 밤

12.12군사반란은 1979년 12월 12일 대한민국 육군 내 불법 사조직인

하나회의 쌍두마차 전두환과 노태우가 주도하는 신군부가 일으킨 군사 쿠데타로

전두환 정부의 실질적인 시작이 되는 사건입니다.

 12.12 군사반란 자체는 법적으로 엄밀한 의미에서는 정부나 국체를 엎거나 국토를 참절하지는 않았으므로

군사반란은 맞으나 내란에 해당하지는 않습니다.

내란은 이후 5.17내란 및 5.18민주화운동 무력 진압에 의해 성립합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피살되어

이후 최규하 대통령이 선출되었으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실질적인 군 지휘권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필두로 일부 신군부 세력은 박정희 사망 이후 권력을 장악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오후 6시경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정승화 총장을 긴급체포 할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쿠데타를 시작합니다.

정승화 총장의 체포 명분은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과 관련한 수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후 7시경 보안사령부 요원들이 서울 용산에 있는 육군본부로 진입해 정승화 총장을 체포했습니다.

체포 당시 정승화는 강하게 항의했지만, 무력에 의해 연행되고 말았습니다.

오후 7시 30분부터 밤 9시까지 서울 시내 및 수도권에 배치된 특전사와 일부 기계화부대가

청와대 방면, 국방부, 계엄사령부 등 주요 기관을 향해 진격했고

전두환의 직속부대인 제1공수여단이 국방부와 계엄사령부를 장악했습니다.

밤 9시부터 자정까지 정병주 특전사령관, 노재현 국방부 장관, 이희성 계엄사령관 등 주요 인사들이

사실상 감금되어 무력화가 되었고 육군본부, 국방부, 계엄사령부를 신군부가 장악했고

결국 서울 시내 요충지 대부분을 신군부가 점령하게 됩니다.

12월 13일 새벽 2시부터 4시까지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은 청와대와 교섭을 시작했고

사태 파악을 한 최규하 대통령은 형식적으로 신군부의 군 지휘권 장악을 묵인합니다.

새벽 5시 신군부가 군권을 완전히 장악했고 정승화 총장은 공식적으로 직무 정지,

이희성 대장이 후임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됩니다.

이렇게 12일 오후부터 13일 새벽까지 약 9시간 동안 대한민국의 운명이 바뀌게 됩니다.

그 결과 전두환은 사실상 군의 최고 실세가 되었으며,

이후 5.17 쿠데타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그리고 1980년 대통령 취임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 당시 일반 시민들의 반응은 쿠데타임에도 불구하고 즉시 크게 반응할 수 없었습니다.

박정희 사망 이후 한국 사회는 큰 충격에 빠져 있었고

대부분의 시민들은 상황을 잘 파악하지 못하거나 무관심, 두려움 속에 조용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시민에게 정보 전달을 하는 언론이 계엄사령부에 의해 검열되고 있었기 때문에

전두환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사실이 언론에는 거의 보도되지 못했고

이에 시민들은 언론을 통해 아무런 정보도 받을 수 없었기에 '군 내부의 문제인가 보다'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서울 시내 곳곳에 전차와 장갑차 공수부대 병력이 배치되면서 일부 시민들은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채고

불안해했지만 대규모 시위나 저항은 하지 않았고 외출을 삼가거나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는 분위기였습니다.

당시에는 조용했지만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지식인이나 대학생, 재야인사들이

'이것은 군의 반란이다'라는 인식을 갖고 5.18 이전부터 신군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기 시작했으나

대다수의 시민들이 행동에 나선 건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부터입니다.

1980년대 중반 전국적으로 대학생 중심의 민주화 운동, 노동운동, 재야운동 등이 확산되었지만

전두환 정권은 이듬해 '직선제는 없다'라고 선언하여 국민의 분노는 폭발하게 됩니다.

1987년 6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이한열 열사 사망 사건으로 인해 전국적 항쟁으로 번지게 되었고

수백만의 시민이 거리로 나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6월 민주항쟁. 결국 전두환은 양보하게 되었고 6.29 선언을 통해 민주화를 수용합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통과되고 1987년 12월 노태우가 대통령 당선됩니다.

이후 문민정부 김영삼 대통령으로 이어지며 점차 민주주의의 기반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김영삼 정부 시절 12.12 군사반란과 5.18 무력진압의 책임을 물었고

전두환 그리고 노태우는 내란죄, 반란죄 등으로 기소되어 유죄가 확정됩니다.

하지만 1997년 국민통합 명분으로 사면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감춰졌던 그날의 일

영화 서울의 봄은 12.12군사반란을 모티브로 한 영화이지만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재현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실화를 바탕으로 한 극영화입니다.

배경은 역사적 배경과 동일하며 주요 인물명이나 사건 구성 묘사 방식은 허구와 각색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히 무장 진압을 묘사하는 장면들에서는 전차가 등장하고 충돌하는 등 긴장감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실제보다 더 긴박한 상황을 연출해 몰입에 도움을 줬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당시 시민들의 움직임이 거의 없었지만 영화에서는 국가의 운명을 건 전투처럼 묘사했고

등장인물의 심리를 강조하여 쿠데타의 부도덕성과 군인의 책임감을 강조하는 바가 잘 느껴졌습니다.

영화는 이 사건 자체에 집중을 했기에 후에 전두환의 유죄 확정 같은 결말이 나오지 않았기에

오히려 영화가 끝난 뒤에 여운이 길게 남았던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퇴보하게 만든 가장 큰 사건이었던 12.12 군사반란은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정치적 또 역사적 사건임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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