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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운전사, 1980년 5월 광주의 이야기

by hanulzzinggu 2025.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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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택시운전사와 광주 그리고 사람들.

감독: 장훈

출연: 송강호, 토마스 크레치만, 유해진, 류준열

장르: 드라마, 가족, 시대극

개봉일: 2017년 8월 2일

러닝타임: 137분

관람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1980년 5월, 서울 택시운전사 만섭은 외국손님을 태우고 광주에 갔다 통금 전에 돌아오면 밀린 월세를 갚을 수 있는 거금 10만원을 준다는 말에 독일기자 피터를 태우고 영문도 모른 채 길을 나섭니다.

어떻게든 택시비를 받아야 하는 만섭의 기지로 검문을 뚫고 겨우 들어선 광주.

위험하니 서울로 돌아가자는 만섭의 만류에도 피터는 대학생 재식과 황기사의 도움 속에 촬영을 시작한다.

그러나 상환은 점점 심각해지고 만섭은 집에 혼자 있을 딸 걱정에 점점 초조해지는데...

 

5.18 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세계에 알린 독일인

그리고 그와 함께한 한국인의 이야기

 

이 영화는 1980년 대한민국 광주에서 실제로 있었던 '5.18 민주화운동'을 전 세계에 폭로한

독일인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와 헤닝 루모어 녹음기자 그리고 그들과 함께

광주의 참상을 알리는데 큰 공헌을 한 한국인 호텔 택시기사 김사복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만들어졌습니다.

독일 공영방송의 일본특파원이었던 독일의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가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게 된 계기는

2003년 5월 18일 kbs에서 방영된 kbs 일요스페셜을 통해서였습니다.

이 다큐멘터리의 부제가 '80년 5월, 푸른 눈의 목격자' 입니다.

kbs가 처음으로 군부 독재정권 시절 자사의 과오를 자신들의 방송을 통해 반성한 것입니다.

힌츠페터는 5월 19일 오전, 일본 언론 보도를 듣던 중

'계엄령하의 광주에서 시민과 계엄군 충돌'이라는 짤막한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 전날 한국군 계엄사령부의 계엄령 선포 등 여러 가지 정황을 봤을 때

평범한 사건이 아니라고 판단해 한국에 여러 번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제대로 연결이 되지 않자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2시간 만에 짐을 싸서 같은 방송국의 녹음 담당 기자인 헤닝 루모어와 함께

5월 19일 오후 직접 서울로 향했고 이는 21일이 되어서야 광주로 향한 대부분의 외신 기자들보다 훨씬 빨랐습니다.

당시의 외국 기자들은 한국에서 취재하려면 국가홍보원에 신고해야 했는데

그는 광주 취재 허가를 받는 것이 불가능하리라 예상했기에 아예 신고를 하지 않고 몰래 잠입했습니다.

5월 20일 오전 외국인 전용 호텔택시 기사 김사복과 함께

당시 최고급 세단이었던 검은색 새한 레코드 로얄 택시를 타고 광주로 내려갔습니다.

처음에는 검문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거의 없었고

서울을 벗어나는 순간 제지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고속도로에 들어선 순간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합니다.

광주로 가는 중에 광주로 통하는 도로를 달리는 차가 자신들 말고 단 1대도 없다는 것을 보고

불길함을 느껴 휑한 도로를 촬영해두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광주로 통하는 길목은 달라서 검문소에서 군인들에게 제지당해

5~10km를 우회하여 마침내 작은 마을에서 젊은이들은 만나게 되었고,

그 청년들이 탄 트럭에 올라타고 시내로 들어갔습니다.

그 결과 광주의 참상 광주의 그날이 그의 컬러 필름에 고스란히 담겨 현재까지도 보존되고 있습니다.

힌츠페터는 종군기자로 활동한 적도 있었지만 5.18 광주민주화운동 만큼 비참한 광경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학살 현장과 병원을 찾아다니며 비디오로 찍으면서 슬픈데도 촬영을 하는 자신을 혐오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자료를 모아야 하니까 슬픔과 참담함 그리고 압도당하는 느낌을 뒤로하고 계속 찍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슬퍼하기만 했다면 자료를 많이 모으지 못했을 것이라고 그는 훗날 말했습니다.

힌츠페어와 루모어는 만 하루 동안 취재를 한 후 21일 오후 광주를 빠져나왔습니다.

이때 검문을 피하기 위해 1등석에 탑승했으며, 공항에서의 필름 압수를 피하기 위해 일부는 허리띠에 넣고

다른 일부는 당시 서울신라호텔에서 팔던 로열 단스크사의 버터쿠키 통 속에 숨겼습니다.

22일 오전 힌트페터만 혼자 광주에서 서울을 경유해 비행기를 통해 나리타국제공항으로 갔고

필름은 공항에서 곧장 모국인 독일로 보내졌습니다.

필름을 넘겨주고 바로 다시 서울로 돌아온 힌츠페터는 23일 계엄군이 일시 퇴각한 상태의 광주로 또 잠입했고

시민 자치하의 광주의 모습을 추가로 촬영했습니다.

김제에서 택시를 타고 외국 회사 주재원으로 위장하고 "광주에 남아 있는 회사 부장을 빼오겠다"면서

군인들을 속이고 광주로 진입할 수 있었습니다.

고급 세단과 외국인 2명 그리고 호텔택시기사였기 때문에 속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필름의 내용은 생각보다 평온했던 시민들의 일상이 담겨있어서

당시 계엄군 측이 언론에 흘린 '폭도가 점령해 아비규환이 된 시내' 같은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확실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힌츠페터는 두 번째 필름을 독일로 보낸 후 5월 27일 세 번째 광주로 들어갔으나

그때는 이미 계엄군의 강제 진압이 이루어져 모든 것이 끝난 뒤였습니다.

힌츠페터의 취재와 영상자료는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날조하려는 시도를 저지하고

오늘날의 평가를 정립하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영화의 내용과는 달리 실제로 힌츠페터와 김사복은 5.18 이전에도 구면이었는데

힌츠페터는 당시 광주에 들어갈 때 함께한 택시운전사 김사복을 다시 만나

그의 택시를 타고 새로워진 한국의 모습을 둘러보는 게 소원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힌츠페터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한동안 한국에 거의 오지 못하는 사이

김사복이 간암으로 투병하다가 1984년 사망하면서 서로 연락이 끊겼고,

이후 힌츠페터 기자는 평생 김사복을 수소문했음에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끝내 거의 생사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영화 개봉 3일 후인 8월 5일 한 사람이 트위터를 통해 자신이 김사복의 큰아들이라고 밝히면서 화제가 된 동시에

진위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확인 결과 진실이었고

김사복이라는 이름은 영화 속 설정처럼 가명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본명 그대로였으며

힌츠페터가 그를 찾았음에도 김사복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건 이미 고인이 된 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생전에 광주민주화운동이 복권되지 못했기 때문에 더더욱 몰랐던 것입니다.

 

그날의 광주가 그들에게 남긴 것과 그들이 우리에게 남긴 것

 

고등학교 근현대사 과목에서 배웠던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지 못했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실제로 좀 더 자세하게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실제인물들에 대해서 조사해 보았는데

영화의 스토리 보다 오히려 실제의 일들이 더 영화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에서 배우 엄태구가 맡은 군인이 등장했던 장면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었는데

실제로 김사복은 훗날 아들에게

"광주에 들어갈 때도 힘들었지만 나올 때는 더 힘들었는데

군인 중 하나가 알고도 보내준 거 같다"는 말을 남긴 적이 있다고 하며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의 회고록에도 군인 중 한 명이 힌츠페터 일행을 묵인한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그 이름 모를 군인이 그 순간 그들을 보내주지 않았다면

지금 한국의 모습을 아주 많이 달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독일 기자 힌츠페터와 한국 택시기사 김사복

그때의 광주의 모습을 보고 난 뒤 그들은 많은 고통을 겪었다고 합니다.

힌츠페터의 아내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내가 한 취재 중 80년 5월의 광주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항상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1986년 11월에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위를 취재하던 도중

사복경찰에게 집단구타를 당해 목뼈와 척추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한국에서 그의 다큐를 볼 수 있을 즈음 기자 생활을 그만두고 독일에서 1년간 병원 생활을 해야 했고

그 수술 후 섬망 증세를 보일 때 광주에서 봤던 군인의 모습을 환각으로 봤다고 합니다.

김사복 또한 그날 광주의 참상을 직접 목격해서인지 광주에서 돌아온 이후 거의 술에 빠져 지냈다고 하며

술자리에서 가족이나 동료들에게 "사람의 탈을 쓴 채로 이래선 안 된다"며

학살극에 대한 두려움과 경멸감을 드러낸 채 고통을 호소했고

지나친 과음을 계속해서 인지 결국 1984년 6월 간암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투병하다

1984년 12월 19일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모국이 아닌 타국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몇 번이고 위험지대로 들어간 독일 기자와

모국이기에 광주로 들어간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독일 기자와 함께 움직인 한국 택시기사

그들이 우리에게 진실을 알려주기 위해 어떠한 생각과 마음으로 희생을 했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수많은 희생이 모여 지금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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