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끝나지 않은 '아이들...'의 이야기
감독: 이규만
출연: 박용우, 류승룡, 성동일, 성지루, 김여진
장르: 범죄, 미스터리
개봉일: 2011년 2월 17일
러닝타임: 132분
관람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대한민국 3대 미제사건의 마지막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
사건 발생 21년...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1991년 3월 26일. 기초의원선거로 임시공휴일이었던 아침 8시경,
도롱뇽을 잡으로 집을 나선 다섯 명의 초등학생들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번 사건을 파헤쳐 특종을 잡으려는 다큐멘터리 피디 강지승,
자신의 의견대로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의 범인을 주장하는 교수 황우혁,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들을 포기하지 못하는 형사 박경식,
각각의 방식으로 사건에 다가서던 중 아이를 잃은 부모가 범인으로 지목되는데...
영원한 미제로 남게 된 개구리 소년들
일명 '개구리 소년 사건'을 소재로 하여,
전 카이스트 심리학자 김가원 교수의 '아이들은 산에 가지 않았다.' 를 원작으로 하여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원작은 '아이들은 산에 가지 않았다.'는 한 교수의 주장에 근거한 내용이다 보니
대부분의 내용이 사실과 다른 점이 많아 그 당시는 물론 현재까지도 많은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1991년 3월 26일 대구직할시(현 대구광역시) 달서구 성서 지역에 살던 5명의 국민학생들이
도룡뇽알을 주우러 인근 와룡산에 올라가서 동반실종 되었다가
실종된 지 11년 6개월이 지난 2002년 9월 26일에 백골로 발견된 사건입니다.
'개구리 소년 사건'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그것은 사건 초기에 언론의 오보로 인해 도룡뇽이 아닌 개구리로 잘못 알려진 것입니다.
사건 발생 날 아침 8시 무렵 성서국민학교(현 대구성서초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우철원 군, 조호연 군, 김영규 군, 박찬인 군, 김종식 군, 그리고 김태룡 군 총 6명의 어린이들이 조호연 군의 집 근처에서 놀고 있었는데 조 군의 집에 세를 들어 살고 있던 청년이 아이들에게 '시끄러우니까 나가서 놀라'라고 핀잔을 줬습니다.
이후 6명의 아이들은 분유 깡통과 막대기를 챙겨들고 인근의 와룡산으로 향했습니다.
6명 가운데 김태룡 군은 같이 따라가려다가 '위험하니 너무 멀리 가서 놀지 말라'는 부모님의 말을 떠올렸고
아침밥도 먹을 겸 혼자 집으로 돌아갔는데 이 선택이 운명을 가르게 되었습니다.
5명의 아이들이 와룡산으로 가는 길에 여러 목격담이 있었고,
그중 같은 학교에 다니던 당시 국민학교 4학년이었던 함승훈 군은 아이들을 보지는 못했지만 중요한 증언을 남겼습니다.
와룡산 바로 밑 군인아파트에서 살던 그는 이 날 다른 무리의 동네 형들과 함께
도롱뇽 알을 찾으러 와룡산 계곡에 갔다가 형들과 떨어져 혼자 와룡산 중턱에 있는 무덤가 근처까지 올라갔는데
"그때 산 위쪽에서 10초쯤 간격으로 날카롭고 다급한 비명소리를 두 차례 들었다. 이때가 점심 먹기 직전이었으니까, 11시 30분쯤 되었을 것"이라고 진술했습니다.
훗날 성인이 된 함 씨는 한 방송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은 끔찍한 소리였다."고 밝혔습니다.
아이들의 부모들은 18시쯤부터 와룡산 주변에서 아이들은 찾다가 19시 50분에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습니다.
경찰은 아이들이 와룡산에서 길을 잃었다고 보고 부모들과 함께 다음 날 새벽 3시까지 산을 샅샅이 뒤졌으나
끝내 아이들을 찾지 못했습니다.
대구지방경찰청 수사본부는 1996년 해체 전까지 5년 간 연인원 30만명을 동원하여
산악수색 48차와 일제 검문검색 43차 외에 복지시설 및 종교단체 1천여개소, 가정집 11000세대를 각각 수색했고
성서초 졸업생 1800명과 공단 노동자 19000여명에게도 수소문해 제보만 570여 건이나 됐지만 전부 허사였습니다.
사건이 워낙 유명해진 탓에 허위제보도 잇따랐는데
수많은 장난전화로 인해 부모와 조사하던 경찰들을 허탈하게 하는 등 수사에 혼선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이 사건의 해결을 바라는 전 국민의 강력한 지지 덕분에
많은 기업들도 개구리 소년들을 찾기 위해 전력을 다해 도움을 주었고
여러 언론매체들도 프로그램을 제작해 심층 분석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큰 관심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찾지 못했고 결국 영구 미제사건으로 기록되었으며
1993년 1월에 실종자 부모들이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에게 탄원서를 냈지만 9월에는 결국 직접 수색을 포기했습니다.
끝내 1996년에 대구경찰청은 수사본부를 해체하고 관련 업무를 달서경찰서 수사 전담반으로 넘김에 따라
경찰서장이 본부장을 맡고 수사인력도 총 10명으로 줄었습니다.
세간의 관심이 거의 사라졌던 2002년 9월 26일, 도토리를 주우러 와룡산에 올라갔던 시민 오우근 씨에 의해
와룡산 기슭에서 실종자들의 유골이 발견되었습니다.
실종으로부터 11년 6개월 만이었습니다.
여기서 경찰은 사건 현장을 잘못 건드려서 크게 훼손시킨 것으로 드러났고
시신 중 감식반의 현장 감식을 받은 시신은 단 1구뿐이라고 합니다.
결국 법의학자들의 부검 결과 둔기로 맞거나 흉기에 찔려 타살된 것 이라는 추정이 내려졌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사망 원인조차 밝혀지지 않았고 당연히 범인도 알 수 없었으며 범죄 도구도 불분명해서
경찰이 여러 도구를 가지고 조사했으나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2003년에 대구경찰청은 수사본부를 해체했고
2005년 11월 28일에 유족들이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공소시효 연장 그리고 폐지를 촉구했지만
2006년 3월 26일 결국 공소시효가 만료되었으며 2015년엔 내사마저 종결되었기에
이제는 범인이 잡힌다고 해도 처벌할 수 없습니다.
모두에게 잊혀지더라도 영원히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개봉 당시에 직접 영화관에 가서 관람을 했었는데
이 영화의 소재인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비슷한 또래였고 실제로 대구에 살고 있었기에
더욱더 몰입이 잘 되고 느끼는 바가 많은 영화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자세한 것까지는 몰랐지만 학교에서 그리고 부모님이
모르는 사람은 절대 따라가지 말고 혼자서 다니지 말라는 주의를 하루에도 몇 번씩 줬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왔었고 충격을 주었던 사건이었습니다.
개봉 전에는 부모가 범인이라 주장했던 사이비 심리학자의 책이 원작이라는 소문이 퍼져
사건을 왜곡한 영화가 아닐까 하는 우려를 사기도 했는데,
그 사이비 심리학자의 주장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가족들의 아픔에 대해 초점을 맞춰 많은 호평을 받은 작품입니다.
사실 이 영화는 기승전결이 일관성 있게 이어지는 극영화라기보다는
10여 년에 걸친 사건의 진행 추이를 조명하는 모큐멘터리에 가깝습니다.
덕분에 이 사건이 어떤 식으로 주목받았고, 어떤 해프닝을 거쳐 왔는지
영화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사실과는 조금 다른 인물로 극 중에서 조작된 방송으로 좌천되어 다시 출세를 위해 이 사건을 이용한 방송국피디
그리고 엉터리 추리를 했고 그 엉터리 추리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아이들의 부모를 더더욱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을 저지르고도 반성조차 하지 않은 심리학자교수
그 두 인물의 행동들을 보면서 인간이란 얼마나 이기적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했습니다.
사건 당시인 90년대에 공소시효 만료로 영원히 범인을 잡을 수 없게 되었는데
그에 비해 훨씬 발전한 수사기술들을 가지고 있고 공소시효도 사라진 지금,
잡는다 해도 처벌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