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하는 자들에 의해 반복된 비극
감독: 조용선
출연: 김상경, 이선빈, 윤경호, 서영희
장르: 재난, 미스터리
개봉일: 2022년 4월 22일
러닝타임: 108분
관람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알고 있었죠,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거"
봄이 되면 나타났다 여름이 되면 사라지는 죽음의 병.
공기를 타고 대한민국에 죽음을 몰고 온 살인무기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그들의 사투.
증발된 범인, 피해자는 증발되지 않았습니다.
침묵과 방조가 만든 재난의 기록
영화 '공기살인'은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모티브로 제작되었습니다.
가습기 살균제란 가습용 물에 첨가하여 가습기를 통해 공기 중으로 분무되도록 만들어진 살균제를 말합니다.
1994년 sk케미칼 (당시 유공) 바이오텍사업부가
'가습기메이트'라는 제품을 처음으로 출시했으며 생산은 동산C&G가 맡았습니다.
이후 옥시, LG생활건강, 애경산업 등이 이를 벤치마킹한 제품을 속속 내놨는데
옥시는 1996년 '가습기당번'을 선보였고 이듬해 LG생활건강은 '119가습기세균제거'
그리고 애경산업은 '파란하늘 맑은가습기'를 각각 출시했습니다.
문제는 이들 업체가 안정성을 담보할 검증 테스트를 전혀 거치지 않은 채
인체 무해성을 강조하며 홍보했다는 점입니다.
이때부터 가습기 물통에 화학물질이 함유된 제품을 직접 넣어 쓰는 방식이 일반화가 되었습니다.
2000년 이후 가정과 사무실 및 공공장소 가릴 것 없이 가습기가 널리 사용되면서
가습기의 위생을 관리하고자 하는 소비자들이 늘어났고
그때부터 가습기 살균제 제품이 우후죽순으로 출시되기 시작했는데
특히 옥시레킷벤키저의 옥시싹싹 가습기당번이 출시되면서
아류작들과 각종 할인점의 PB제품들이 판매되었습니다.
이 제품들로 인한 최초 사망자가 발생하게 되는데
1995년 8월에 사망한 54세 성인이 그 첫 번째, 두 번째는 같은 해 11월 사망한 1개월 된 영아였습니다.
사망한 영아의 어머니는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감기에 걸려 가습기를 밤낮으로 틀면서 가습기메이트를 썼다"며
"아기가 코가 누렇게 나와서 소아아동병원에 입원시켰는데 하루 만에 사망했다"고 증언했습니다.
2006년 소아과 환자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일선의 의사들이 직접 나섰습니다.
서울아산병원 소아청소년과 홍수종 교수는 동료 의사들 50여 명에게 메일을 보냈고
그들의 답변으로 동일한 폐 질환으로 병원에 온 환자들이 전국적으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수만 해도 80여 명에 육박해 홍수종 교수팀은 관련 사례를 모아 논문을 발표하였지만
당시에는 소아과에 국한된 질환으로 생각되었습니다.
5년 후인 2011년 서울아산병원 응급실과 호흡기내과에
원인무상의 폐질환 증상을 보이는 임산부 환자들이 대거 입원하게 됩니다.
서울아산병원은 호흡기 질환과 관련해서 체외순환막형 산화요법을 실시할 수 있는
첨단의료설비가 되어있는 병원으로 다른 병원에서도 중증의 호흡곤란 환자들을 보내기도 하는 곳이기에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임산부들이 모인 것입니다.
처음의 산모가 죽음을 맞이하고 한 달 후인 4월 초
4명의 출산직전의 임산부가 숨진 산모와 비슷한 증상으로 입원했습니다.
검사 결과 환자들에게서 치명적인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종 폐 질환을 일으킨 원인은 바이러스나 세균성 감염이 아닌 다른 원인이 있는 것으로 추측되었고
서울아산병원 호흡기내과의 임채만 교수는 회장으로 있던 모임인 호흡부전연구회 회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다른 병원 임산부 또는 출산 직후 여성에게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폐질환 사례를 진료한 적이 있거나
진료하고 있는지를 조사했는데 네 곳의 병원에서 유사한 환자가 있다고 알려왔습니다.
이에 이 원인 미상 폐질환이 전국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보고
2011년 4월 25일 서둘러 충청북도 오송에 있는 질병관리본부에 역학조사를 요청했습니다.
2011년 8월 31일 역학조사 결과 원인 불명의 폐질환의 원인을 가습기 살균제로 추정했는데
폐질환이 발병한 산모들은 모두 20~30대의 여성이었는데 특이하게도 발병시기가 매우 비슷했고
겨울이 끝나갈 무렵이나 초봄인 2~3월 무렵부터 발생하여 서서히 진행되다가
어느 순간 하루 이틀 만에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역학조사 결과 가습기 살균제가 용의 선상에 올랐으며
2011년 11월 10일, 원인이 가습기 살균제로 확정되었고
해당 제품들에 포함된 화학물질인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 등이 폐 손상의 원인으로 지목되었습니다.
다음날 2011년 11월 11일 보건복지부가
가습기 살균제 6종에 대해 제품 강제 수거 명령 및 사용 중단을 강력히 권고했습니다.
2012년 2월 질병관리본부가 동물 독성실험 결과를 최종 발표했는데
동물 실험 결과 가습기 살균제가 신종 폐질환과 유사한 증상을 일으키는 것이 확인되면서
가습기 살균제가 가장 유력한 원인으로 꼽히게 되었습니다.
가습기 살균제가 가장 유력한 원인으로 밝혀지자 기업들은 가습기 살균제의 생산을 중단하기 시작했으며
소비자 단체를 중심으로 살균제를 생산해 온 업체들을 상대로
소송이나 불매 운동을 벌이려는 움직임도 벌어졌습니다.
2012년 7월 24일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및 시민사회단체가
가해 기업 및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2012년 10월 국정감사에서 해당 업체가 유독한 물질임을 알고서도 제조했다는 주장이 나왔는데
SK케미칼이 2000년대 초 가습기살균제 '가습기메이트'의 흡입독성 원료 교체를 검토했다는 내부 보고서와
가습기살균제 원료를 바꾸려 한 사실이 알려진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또한 회사 내에서 '사람 목숨이 위협받는다'며 제품의 안정성을 우려한 정황도 드러났습니다.
2013년 7월 질병관리본부에서 조직된 폐손상 조사위원회에서
피해 의심 사례를 대상으로 가습기 살균제와의 관련성을 조사하여
2014년 3월에 그 결과를 발표했는데 의심 사례 361명 중 거의 확실한 환자가 127명(사망 57명),
가능성이 높은 환자가 41명(사망 18명)으로 조사되었고
2014년 7월부터 2015년 4월까지 2차 조사가 진행되었으며
그 결과 거의 확실 사례 28명(사망 12명), 가능성이 높은 사례 21명 (사망 5명)이 추가되었습니다.
따라서 총 피해 신고 사레 530명(사망 140명) 중 정부에서 인정한 피해자는 221명(사망 92명)이며
2015년 말까지 3차 피해 조사 신청이 진행되었습니다.
2015년 12월 31일까지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한국환경산업기술원에서
의료비 및 장례비에 대한 정부 지원금 지급 신청을 받았고
정부의 피해 접수는 2016년 1월 4일은 마지막으로 종료되었습니다.
2020년 7월 27일 국가기관인 사회적 참사특별조사위원회는
가습기살균제 사용으로 인한 건강 피해 경험자가 약 67만 명에 달하며
사망자는 약 1만 4000명으로 추산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고
2022년 기준 추정치는 사망자 약 2만 명, 건강피해자 약 95만 명입니다.
들이마신 건 공기 아닌 기업의 탐욕
영화 '공기살인'은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주제로 한 소재원 작가의 소설 '균'을 바탕으로 제작된 작품입니다.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되 한 가정의 비극을 중심으로
서사를 단순화하고 책임을 져야 할 '기업'이라는 실체를 명확히 각인시키는
극적 장치를 사용해 추리극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강하게 느낀 것은 '영화보다 현실이 더 잔혹하다'라는 점이었습니다.
실제 사건 당시 가해 기업들의 대처는 진정성 없는 형식적인 사과와
독성 실험 결과나 유해성 정보를 은폐·축소했고
피해자 지원보다는 책임을 회피하는 것에만 집중했으며
사건 초기 정부의 대응 또한 부실했는데
2011년 이전까지 피해 사례를 방치했고 질병관리본부가 사망 사례를 확인한 후에도 대응이 늦었으며
환경부, 식약처 등 관련 부처는 제품 안전 관리 소홀,
제품 허가나 유통과정의 실질적인 안전기준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점 등 무능하기만 했고
피해 신고 시스템도 제대로 마련되지 않아 초기 피해자들은 외롭게 싸워야 했습니다.
2017년 특별법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특별법'이 제정된 이후
조금씩 제도적인 피해자 구조가 이루어졌지만 보상 기준이 엄격해 많은 피해자들이 제외되었다고 합니다.
영화 속 주인공은 가족을 잃고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에 영웅 서사가 있지만
현실의 피해자들은 그 어떤 주인공도 되지 못한 채 수년간 방치되고 건강을 잃고 누군가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영화에서는 "우리가 뿌린 공기 속에 독이 있었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보여주지만
실제 사건에서는 그 독을 만든 이들이 오히려 고개를 빳빳이 들고 법정에 섰으며
가해 기업들은 끝까지 책임을 회피했고 정부는 사과는커녕 조사조차 미흡했습니다.
영화 '공기살인'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집단적 책임의 역사를 보여줬으며
피해자들이 아직도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법이 기업 편이었다'는 현실을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신은 이 문제를 외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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