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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배신과 희생의 그늘 속에서

by hanulzzinggu 2025.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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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자유를 위한 총성

감독: 최동훈

출연: 전지현, 이정재, 하정우

장르: 첩보, 시대극

개봉일: 2015년  7월 22일

러닝타임: 140분

관람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1933년 조국이 사라진 시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 측에 노출되지 않은 세 명을 암살 작전에 지목합니다.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 신흥무관학교 출신 속사포, 폭탄 전문가 황덕삼.

김구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임시정부 경무국 대장 염석진은 이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합니다.

암살단의 타깃은 조선주둔군 사령관 카와구치 마모루와 친일파 강인국.

한편, 누군가에게 거액의 의뢰를 받은 청부살인업자 하와이 피스톨이 암살단의 뒤를 쫓는데...

친일파 암살작전을 둘러싼 이들의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이 펼쳐집니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영화 '암살'은 1932년 3월에 실제로 진행되었던

조선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의 암살 작전을 모티브로 제작되었습니다.

우가키 카즈시게는 1931년부터 1936년까지 조선 총독을 지낸 일본의 군인 출신 정치인입니다.

그가 조선총독직에 있던 시절,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강화하고

조선인에 대한 탄압을 극도로 강화한 인물로 유명합니다.

1930년대 초반, 일본은 한국 내에서 독립운동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더욱 강력한 통제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에 맞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의 주요 인사들을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는데

이는 한국의 독립을 위한 중요한 전략 중 하나였습니다.

우가키 가즈시게 암살 작전은 김구의 지시에 따라 진행된 것으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일본의 핵심 인물들을 제거하는 전략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작전은 임시정부의 독립군인 유진만, 이덕주 등을 중심으로 세워졌고

이들은 일본의 고위 관리들이 자주 다니는 길목을 중심으로 암살을 준비했습니다.

특히 우가키 가즈시게가 자주 다니는 곳을 타깃으로 삼았습니다.

암살에 필요한 장비와 인력 등을 사전에 준비했고

암살이 성공할 경우 일본 통치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일본 경찰은 이미 이들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었으며

1932년 4월 7일 일본 경찰에 의해 독립군이 체포되었고

체포된 이들은 곧 일본 경찰의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체포된 독립군들은 고문을 당하며 자백을 강요받았으며 결국 암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우가키 가즈시게 암살 작전은 직접적인 암살 실패로 끝났지만

이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군들의 독립 의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게 되었고

일본의 식민 통치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었으며

이후에도 임시정부는 다양한 방법으로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독립군 몇 명은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며

그들의 희생은 이후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기록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빛난 영웅들

영화 '암살'은 전체적으로 친일파 암살, 의열단의 방식, 그리고 광복군의 활동 등이

적절히 분배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특히 영화 '밀정'과 함께 독립운동사에서

상대적으로 과소평가된 김원봉을 나름 비중 있게 다룬 작품이기도 한데

독립운동가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항일 무장 독립운동의 상징 중 하나로

'의열단'과 '조선의용대'의 창설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김원봉은 1898년 8월 28일생으로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습니다.

3.1 운동 이후 결단력 있는 무장 투쟁 없이는 독립이 어렵다고 판단해

1919년 11월 중국 길림에서 '의열단'을 결성합니다.

친일파 및 일본 고위 관료 암살과 일제 통치기관 파괴를 목표로

조직적이며 치밀한 테러 작전을 통해 일제에 공포감을 안겼습니다.

김원봉은 장개석의 국민당 정권과 손잡고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했는데

이때 동지였던 조선 청년들이 많았고

후일 항일 무장 투쟁의 중추가 되어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세워 독립군 간부를 양성합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최초의 한국인 무장 독립군 부대인 조선의용대를 창설합니다.

조선의용대는 중국 전선에서 일본군과 실제로 교전한 부대였으며

후일 조선의용군과 합류하거나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으로 통합되기도 했습니다.

광복군에 합류한 김원봉은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이 되고

그동안 비임정 계열로 활동하던 그가 임시정부에 들어오면서

독립운동계 통합에 큰 상징적 의미를 남겼습니다.

해방 후 귀국한 김원봉은 좌우 합작 운동을 지지하며 중도 좌파 계열 정치인으로 활동했으나

반공주의가 강화되면서 탄압을 받았고 결국 1948년 월북합니다.

북한에서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내무상, 부수상을 지냈으나

1958년 이후 숙청 또는 자진 은퇴설 등이 존재합니다.

정확한 사망 시기는 불분명하나 1958년경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월북 후 북한 정권에 참여한 점 때문에

남한에서는 오랫동안 역사적으로 평가절하 되었고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인정에서도 제외되었습니다.

하지만 김구, 윤봉길, 안중근과 더불어 무장 독립 투쟁의 대표 인물이었고

실제 투쟁력 있는 독립운동 세력을 조직하며 전선에서 활동한 인물이기에

최근에는 재조명의 필요성과 함께 복권 논의도 일부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영화 '암살'에서 실명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의열단 단장'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는 김원봉을 오마주한 캐릭터로 해석됩니다.

영화는 독립운동가들의 치열한 삶을 영화적 상상력으로 풀어내면서도

공감과 통쾌함을 이끌어냈습니다.

다만 실제 독립운동은 더 치밀하고 조용한 희생의 기록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며

김원봉처럼 정권과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서 잊혀진 인물들이 더 조명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역사를 영화로 배운다고 해도 그 안에 담긴 진짜 이야기를

한 번은 찾아보는 게 좋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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